겨울 섭생의 길 일기


1.
내 전자렌지에 화산이 생겼었다. 베이글 하나를 넣고 살짝 데우려 했는데 그만 잊었다. 잠시후 다른 음식을 만지다가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났다. 헌데 전자렌지는 까맣게 잊고 만들던 음식만 이리저리 보고는 어라? 안 태웠는데? 해버렸다. 나는 그렇게 많은 연기가 나오는 음식, 아니 물건을 본 적이 없다. 연기 정도가 아니라 연막을 뿜어내는 베이글을 보면서 최루탄을 생각한건 역시 철지난 486의 트라우마? 어쨌든 삽시간에 온 방 안이 구름 속이 되었다. 다행히(?) 연기 탐지 경보기가 울리지 않았지만, 모든 창문과 현관문을 열어놓은 덕분에 결국 경비 아저씨 올라옴. 아직도 냄새가 푹 절어 있어 졸지에 옷장 밖에 걸려 있던 옷들은 모두 훈제 겨울옷이 되어버렸다.

2.
국물용 멸치를 사왔다. 반 상자에 14,000원, 그리고 한 관에 5,000원이라는 아몬드, 천원이 남길래 호두 천원 어치. 조금 더 걷다가 가게가 아니고 가게 밖에 앉아 계신 나이드신 부부 분들에게서 국산 추정 대추 한 되 3,000원 어치. 꿀이 있으니 대추차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다시 조금 더 걷다가 국산이라 주장하는 보리차 한 봉지 3,000원. 모두 서울에서 건어물로는 가장 큰 시장인 중구 중부시장에서 늘 산다. 그런데 보리차는 왠지 옛날에 비해 싱겁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그래서 끓일 때마다 양을 늘이는데도 불구하고 어릴 적처럼 구수한 맛이 안 느껴진다. 대만에서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무쇠남비가 있으면 한번 더 볶으면 좋을 것을. 사진에는 보리차가 가장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멸치가 더 많다.

3.
즐겨 만들고 손님들이 궁금해하는 초간단 허무 샐러드 드레싱은 딸기 요플레 + 설탕 + 사이다 + 소량의 간 양파. 토요일과 일요일 양상치 하나와 작은 파프리카 두 개를 다 먹었다.

4.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채 몇 년을 묵혀 두었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을 오며가며 읽고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 부분을 읽고 있는데, 지난 여름 안면도를 가면서 입구를 찾지 못해 지나쳐버린게 너무 아쉽다. 되돌아가기에 너무 애매한 시간이었고, 또 이미 해미읍성을 돌아본 아이들이 빨리 바닷가로 가고 싶어해서 결국 다음으로 미루었었다. 꼭, 12월에는 꼭 가고야 말겠다.

5.
그 맛을 잊지 못해 목놓아 어머님께 부르짖었더니 친구분에게 전화를 하셔서 한 상자를 아예 내 주소로 주문해주셨다. 그래서 드디어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바로 해남의 '화산 호박고구마'였다. 이건 10kg짜리 한 상자인데 내 기억에 23,000원 주셨다 했다. 이미 반 정도는 먹거나 나누어주었고 사진이 한 절반 정도 남은 것이다. 내 일생에 가장 맛있는 고구마라고 할 수 있다. 단점이 있다면 당도가 몹시 강하고 방안은 따뜻해(오피스텔에는 베란다가 없다) 어디고 작은 상처가 있을 경우 하얀 곰팡이가 빨리 올라온다는 점. 그렇다고 청결하지 않다던가 하지는 않다. 단지 당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일뿐. 오히려 남도의 황토가 그대로 묻어 있어 씻어내면 붉은 흙물이 말 그대로 벌겋게 배어나온다. 흙 향기도 참으로 좋다. 맛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김모 화백 말투 -.-).

6.
세어보니 이 짧은 글 쓰는 동안에 대추를 일곱 개나 먹고 여덟 개째 물고 있다. 인사동 지대방의 대추차가 생각난다.

지난해 겨울 어간에 지대방에서 찍은 폰 사진. 바로 이 잔에 대추차를 가득 내어온다. 아 저거이 진짜 대추차인데 말이다, 하면서 지금 아홉 개째 대추를 입에 넣었다.


덧글

  • bluexmas 2009/11/17 00:16 # 답글

    아 고구마 맛있어 보입니다. 먹고 싶어지네요. 쪄서 배터지도록 먹고 내일 일 걱정없이 자고 싶습니다T_T
  • 백면서생 2009/11/17 00:34 #

    맛있습니다. 비밀댓글로 주소 적어주시면 나눠드릴게요.
  • 2009/11/17 02: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백면서생 2009/11/17 12:23 #

    ^^
  • Hendrix 2009/11/17 08:52 # 삭제 답글

    한 번 80년 회군. 86년 5.3 인천 항쟁. 87년 6월 10일의 기억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기회가 되면 해장국 드실까요?
  • 백면서생 2009/11/17 12:24 #

    전화 주세요. 해장국에 대추차, 한번 합시다.
  • cleo 2009/11/17 10:23 # 답글

    2.국물용멸치 보고있으려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 생각이 간절합니다. 대추차도 먹고싶고...우리집 김치냉장고에 놀고있는 유기농대추(지인이 보내준) 많은데...-.-:

    4.작년에 천리포수목원 가면서 '서산마애삼존불' '해미읍성'...그 부근을 '문화유산답사기'와 함께 둘러봤어요. 유홍준씨가 소개한 곳은 북.한.말고는 거의 다 답사했지요. 대한민국 좁다하지만...구석구석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어찌나 많던지...

    5.역시나...'군고구마' 생각...오늘따라 왜이리 먹고싶은 것도 많은지...다 서생님 때문이라는...ㅠㅠ 부산에도 간밤에 흰눈이 왔어요. 괜히 맘이 설레서 회사 땡땡이치고 놀러가고 싶은거 꾹 참고 출근했어요~
  • 백면서생 2009/11/17 12:29 #

    아아 수제비, 어릴 때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걸 전라도에서는 '뜨덕국'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커서도 수제비와 그것이 다른 음식인줄 알았더랬습니다. 그립습니다. 그 '언니'도 보고 싶구요.

    문화유산답사기의 장소들을 모두 들러보았다니, 이 땅의 선택받은 소수이심에 틀림없군요. 그리고 저는 매우 불행합니다.

    고구마 아직 좀 남았는데, 보내드릴까요. 주소 비밀댓글로 적어주세요.
  • cleo 2009/11/17 21:53 #

    선택받은 소수라기 보다는...우리 가족들 모두 노마드족의 후예들인지 돌아다니는걸 너무 좋아해서 여행을 좀 많이 한 편입니다. 지난 시절 생각하면 여행추억밖에 없습니다. 돈 벌어서 여행, 책, 음반 사모으는데 거의 투자했어요. 물론, 노후대책 같은거 없고...하다못해 생명보험 하나도 못 들었어요 ㅠㅠ

    고구마 보내주시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저 위 xmas님 답글에 저요~oi (나두...) 하고 싶었는데...체면이고 뭣이고 덥썩 받고싶지만...역시나 제가 좀 미안할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백면서생 2009/11/18 01:02 #

    여행을 그리 다닐 수 있었고 거기에 책과 음반이라면 '트리플 크라운'이군요. 행복한 가족이 사시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란 도연군은 커서 어떤 친구가 될까 많이 궁금해지는군요. 노후대책, 보험, 모두 부질없음입니다.

    고구마는... 미안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모자라는 건 못 나누고, 주기 싫은 사람은 주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 늘보아이 2009/11/26 01:09 # 답글

    저희집에도 고구마가 쌓여있어요
    오늘은 튀겨보았죠 ㅎㅎ

    내일은 양파장아찌와 새송이버섯전을 해보려합니다

  • 백면서생 2009/11/26 13:25 #

    튀김... 제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고구마튀김이라면 거리에 파는 그 달고 바삭바삭한 그것? 먹고 싶어요 -.- 제가 가진 고구마는 이미 거의 다 먹어서 보내드릴 수가 없네요.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양파장아찌도 어려울 것 같은데... 만드는 법 좀 알려주세요. 양파는 거의 제 주식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장조림을 만들었는데, 생강이 없어 못 넣었더니 고기 냄새가 나요 ㅠ.ㅠ 호주산이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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