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평화 해석놀이

아래의 글을 읽고 생각난 것들을 적어본다. 메이지 유신 때까지 264년간 일본을 통치했던 도쿠가와 막부와 그것을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에 관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22권. 세키가하라 전투. (각시수련 님의 블로그)

여기 더하여 위키피디아의 아래 항목도 참고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1.
내가 알고 있던 그는 거의 대부분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대망>,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이야기인 <대멍청이>(이건 비슷한 시기에 읽었지만 작가도 출판사도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한마디로 '평화'의 사도로 묘사되었다. 역경을 딛고, 인내와 끈기, 뛰어난 전술과 정치력, 그리고 몇 차례의 행운 등으로 빚어진 위대한 인물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모도 료마와 더불어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 수위를 다투는 인물로, 역시 소설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말그대로 불세출의 천재로 묘사된다. 이들의 특징을 작가는 이렇게 비유한다.

'울지 않는 새를 어떻게 울게 할 것인가. 오다 노부나가는 바로 칼로 베어버린다. 울지 않는 새는 필요없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거나 새가 좋아하는 것을 갖다주어 울게 만든다. 목적을 어떻게든 달성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볼 때 이 묘사는 적어도 소설에 묘사된 세 사람의 영웅(일본의)을 가장 정확하게 비유했다.

이밖에 이런 구절도 있다. 이에야스는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라고 설파했다는 것이다. 즉, 절대 서두르거나 무리하면 안 되며, 묵묵히 참고 인내하여 목적지에 마침내 도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심히 일리가 있어 기억해 두고 가끔 써먹었다.

또한 사실인지는 모르나 그가 깃발에 새기게 했다는 '흔구정토 염리예토欣求淨土 厭離穢土'라는 문구는 아직도 기억한다. '정토를 염원하며 혼탁한 세상을 바로 잡는다'니, 참으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대망>에 나타난 이 세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군상, 특히 더없는 충성을 다하는 각각의 '가신'들의 이야기는 고등학생으로 처음 접했던 나를 퍽이나 감동시켰다. 고등학교 때만 두 번 읽었고, 지금까지 합하면 아마 다섯번 이상은 완독했을 것이다. 우리와 관련된 임진왜란에 관해서는 그나마 간접적으로 짧게 나오고 그저 이순신 장군이 무적의 귀신(군신도 아니고 '바다의 귀신' 쯤으로 묘사되고 있다)으로 잠시 언급되는 것 정도였으나 소설 자체는 더없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란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평화를 일구는 자, 거의 성인급으로 알고 있었다.

2.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런 내 인식은 자주 혼란스럽게 되었다. 워낙 일본사를 잘 모르지만, 그를 교활한 책략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실제로 그를 신격화한 <대망>에서조차 타인의 입을 빌어 '교활한 늙은 너구리'로 묘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요컨대 그는 그저 성공한 인물이었고, 그 성공의 결과로 신격화되었다고 할까.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에도 막부를 타도한 메이지 유신 이후 그에 대한 평가였고, 오히려 <대망>의 시각이 이를 뒤집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미야모도 무사시>,<료마가 간다>로 유명한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는 거의 사악한 협잡군 정도로 그려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최근 모 케이블 방송에서 본 <공명의 갈림길>이라는 일본 드라마와 또다른 매우 지루한 히데요시의 아들 이야기(이건 대만에서 보았는데, 드라마 제목도 기억 안남)에서도 역시 음험한 책략가 정도가 되어버렸다. 특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주인공이 히데요시 측 무장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의 간신배 수준이었다.

3.
방금 트랙백을 한 각시수련님의 글을 보고 위키 등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뭐 남의 나라 수백년 전 정치가 이야기가 그리 심각할 것이 있겠는가만, 그래도 약간 새겨 볼 것이 있었다. 즉, 역시 해석자가 누구냐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우선 시바 료타로는 이에야스가 멸망시킨 토요토미 가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의 광신하는 사람이다. 이에야스를 악당으로 묘사한 그의 소설 <세키가하라>는 히데요시 가문과 그를 따르는 영주들이 이에야스를 따르는 영주들과 최후로 결전을 벌이고 마침내 패배한 곳이다. 이로써 토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은 멸망했다.

히데요시는 누구인가. 말할 것 없이 조선을 침략했던 장본인이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말한 자다. 즉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뭐 그럴 수도 있다. 안 될 것 없었다. 사실 300년 후 이걸 결국 실천한 자들이 메이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 아니었던가. 정복은 일단 했으나 통치할 겨를 없이 쫓겨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들이 바로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사카모토 료마, 얼마전 어떤 조사에서는 심지어 오다 노부나가조차 제치고 가장 인기있는 역사적 인물이 된 바로 그 사카모토 료마와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확대 주창한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료마가 간다>는 그 료마의 이야기고.

다시 야마오카 소하치를 보자. 그의 <대망> 서문에는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가 나온다. 패전 후 혼란스런 긴자 거리를 걷다가 술이 취해 미군 병사와 걸어가는 여인을 보았으며, 저들에게 희망을 주는 소설을 쓰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종군기자 출신으로써 가미카제 자살 공격대로 죽어간 젊은 비행사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비칠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그들이 '공중관음空中觀音', 즉 하늘에서 산화한 관세음보살들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분노하거나 냉소할 필요는 없다. 그들 개인이 군국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군국주의자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평범한 삶을 살다가 징집되어 끌려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없었다고 본다. 나는 이 구절을 참으로 인상깊게 읽었다. 나도 친할아버지가 독립군으로 일본군에 의해 전사하신 유족이지만, 일본인들 자체에 대한 원한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런데 작가는 관음이라 했다. 관음이라니, 그 악마 같은 가미카제가 관음이라니.

4.
시바 료타로는 사카모토 료마, 미야모토 무사시 등 일본사의 신화적 존재들을 신화적으로 그린다. 물론 소설들이지만 너무나 허구가 많아 일본인들조차 고증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단다. 히데요시는 소설로 쓰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장 추앙하는 인물이었다. 과잉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조선정벌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교활한 인물이고) 위대한 히데요시를 배신하고 그 가문을 멸망시킨 간악한 자이며, 쇄국으로 260여년 동안 일본을 가두어놓은 장본인으로 본다. 그걸 열어젖히는데 공헌한 사카모토 료마는 그래서 영웅이고. 하기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인물 료마를 영웅으로 만든게 시바 료타로 자신이니까.

반대로 야마오카 소하치는 <대망>을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평화'를 염원하는 눈을 가지고 썼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의 독자들, 즉 당시의 일본인들에게는 '평화'가 정복보다 소중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눈에 '교활한 늙은 너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란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연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물론 야마오카 소하치 자신은 이른바 일본의 '우익' 중 한 사람이었다. 그냥 우익도 아니고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답게 나중에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라는걸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모임은 19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통합하여 이른바 '일본회의'가 되는데, 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바로 지겨운 일본 교과서 왜곡의 주범 중 하나였고 통합 후에도 계속 그 짓들을 하고 있다.

5.
두 작가 모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일본의 우익이다. 그리고 일본 역사의 한 정점을 만든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해석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시바 료타로는 이에야스를 일왕을 억압하고 일본을 쇄국으로 이끈 악마의 수장으로, 야마오카 소하치는 그를 전란으로부터 민중을 구한 영웅으로 정반대의 시각에서 각각 해석했다.

여기서 '우익이란 무엇인가'를 논할 생각은 없다. 누가 나쁜놈이고 누가 좋은놈이고를 가름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에야스는 일본인들에게 그렇게 '간지'나는 영웅은 아니다.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는 내가 보기에도 매력적이다.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강인하고 치열한 지도자였으며, 특히 구각을 깨는 혜안과 결단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어떤가.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원흉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서민의 영웅, 감히 대륙을 넘본 위대한 인물이다. 그에 비해 이에야스는 두 영웅의 죽음 이후에 음험하게 대세를 장악한 뭔가 찜찜한 영웅이다. 그런 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의외로, 혹은 말 그대로 해석하는 자의 관점에 달려있으며, 평화를 원하는 자는 평화의 화신으로, 전쟁을 원하는 자는 비겁한 배신자로 그렸을 뿐이다.

6.
너무 길게 썼으니 이만 줄이련다. 또 버릇이 도졌나보다. 많이 지웠는데도 참 지루하게 많다.

사실 시바 료타로가 악당은 아니다. 그냥 일본적인 것, 일본 정신, 그런 것들을 소설가로 열심히 부각시키려 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는 70년대에 일본 속에 아직 남아 있는 한국문화라는 화두를 가지고 많은 자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재일 사학자 김달수 같은 사람이 그와 같이 일본에서 많은 자료와 사적들을 찾아내고 정리하기도 했다. 그만큼 단순하게 누군가를 혹은 어떤 사실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상대주의는 몹시 가증스럽고 짜증난다. 중요한 것은 '내'가 확고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대상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해석자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소설은 소설 본래의 의무대로 멋지고 화려하게 '말'을 하였고, 그걸 듣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귀'에 달려 있다. 내 머리가 비어 있으면 아무렇게나 울리다가 흩어질 것이요, 바른 생각으로 차 있으면 바르게 공명할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으면 성서를 읽고 악마가 될 수 있고 불경을 읽고 야차가 될 수도 있다. 증거는 우리나라에 한가득 있으니 멀리 갈 것 없다.

7.
야마오카 소하치가 소설을 끝낸 1967년에서 1년이 지난뒤 도쿄 올림픽이 열리고 일본은 마침내 패전의 참상에서 부활했다. 비록 그의 염원이나 그 소설을 읽던 독자들의 희망이 '평화'였을지는 몰라도, 그는 3년 뒤인 1971년, 앞에서 말한 '일본을 지키는 모임' 결성에 참여했고 그 모임은 일본 우파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오늘날 이웃나라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평화', 그의 '평화', 그의 뒤를 이은 일본 우파들의 '평화', 이에야스의 '평화', 일본 민중의 '평화', 우리의 '평화'는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어떻게 외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 즉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

다시 말하면, 평화란 만들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물체라는 말이다. 내가 아주 오래전 그 살벌했던 대학 입학시험을 앞두고도 열렬히 읽었던 소설 <대망>에서 주인공은 그 평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주조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신앙했던 '신불神佛'의 도움인지 성공했고, 어떻게든 일본 민중을 300년 동안 큰 전란 없이 평화롭게 살게 해주었다.

그러니 되었다. 뭘 더 바라겠는가. 30년, 아니 3년이라도 평화를 만들어주면 나는 누구든 주저없이 영웅으로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준비되어있으니 어서 평화를 실현하고, 와서 내 절을 받으시길 바란다.




덧글

  • tranGster 2009/09/28 08:32 # 답글

    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세키가하라가. 이시다 미쓰나리 이야기 였던가요? 전에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헷갈리는군요.
  • 백면서생 2009/09/28 11:56 #

    맞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가 몰락합니다. 히데요리가 죽고 히데요시 가문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이후 또다른 전투였습니다.

    지나치게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che 2009/10/06 22:38 # 삭제 답글

    긴 글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 백면서생 2009/10/06 23:33 #

    길고 서툰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종 오십시요.
  • 선글라스김 2009/12/29 16:36 # 답글

    무척 잘 읽었습니다. 이십대의 중반이 되어서야 대망이라는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되어 무척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역사적 시료에 대해 어떠한 가치관과 해석하고자 하는 방향을 가지고 이해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는가. 또 이에 대한 어떠한 자세로 문학, 더 나아가 문학을 통해 비친 역사와 현재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커다란 시사점을 주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 백면서생 2009/12/30 02:14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라는걸 모두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리 쉽지 않다는 생각이 갈수록 듭니다. 거기 더하여 문학이라는 틀로 다시한번 주조될 때는 더욱 그렇지요. 그런 면에서 <대망>은 자기완성도가 많이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마오카 소하치는 사실 그다지 극렬한 이데올로그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좀 보수적인 우파 지식인이었지요. 소설 속에서도 '평화'에 대한 신념, 가치에 대한 흔들림없는 믿음과 실천이 아주 잘 그려져 있습니다.
  • 페스츄리 2009/12/30 20:57 # 삭제 답글

    백면서생님 정말 명문입니다.^^;;;

    전 백면서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논지가 정연하시고 글이 막히는 곳이 없이 쭉 읽어내려가실 수 있게 쉽고 정확하게 쓰신다는 겁니다. 아..아 저도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은 도서관에서도 쉽게 빌려 볼 수 있는 아주 유명한 책인데도 실제로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바 료타로도 정독으로 읽어본 소설은 거의 없으면서도 제 블로그에서 심하게 비판을 햇으니, 백면 서생님의 글을 읽고 난 후 부끄럼마저 느낍니다.

    야마오카 소하치가 가미카제를 벌인 일본의 공군 조종사들을 관음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좀 충격입니다. 아마 자기의 역사를 전면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본의 소박한 애국자가 야마오카 소하치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진짜 군국주의자였다면, "평화"를 염원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그렇게 재평가 하지는 않았겠지요. 사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바는 좀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 올빼미의 성에서 히데요시를 닌자와 당당하고 교활하게 협상을 시도하던 당찬 사내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역시 "정치적 경향은 비슷해도" "관점"이 달라지면 우파내에서도 어떻게 선명하게 스펙트럼이 갈리는지를 백면서생님의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바 료타로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찬양과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바를 군국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야마오카 소하치는 "평화를 가져온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찬미햇지만, 일본의 근대적 역동성과 자주성을 소중히 여긴 시바는 도쿠가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아즈치 모모야마시대의 일본 밖의 여러 나라의 문화와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고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했던 시대의 욕구를 좌절시킨 군주 이른바..쇄국과 퇴보의 질곡으로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시바료타로가 군국주의를 찬양할 것 같지만, 거부했던 것과 달리 야마오카 소하치가 오히려 우회적으로 그것을 상당히 긍정했던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근대성의 맹아가 바로 도쿠가와 이전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바는 군국주의야말로 근대성의 오도로 나타난 기형적 현상이며 그것은 바로 도쿠가와 막부라는 굴곡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판단햇던 반면에 "화혼양재"를 중시했던 야마오카 소하치는 오히려 도쿠가와 막부야 말로 "도덕성의 근원"이며 메이지 유신이후 일그러진 일본의 도덕감정과 대외적 야욕을 치유할 수 있는 "계시"를 주는 시대로 바라보았으니 똑같이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던 "보수 우파"라고 해도 그들의 역사적 "눈"은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결론은 둘다 "지난 일본은 어찌 되었든 가치있고 지켜야 하는 소중한 야마토다마시이"다이지만 그 단순한 애국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 다른 과정의 붓끝놀림을 했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아이고..단순한 오독일 수 있습니다. 괜히 횡설수설을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무튼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백면서생 2009/12/30 23:48 #

    아이고, 부끄럽게 왜 이러십니까. 그냥 이것저것 생각나는대로 써보았을 뿐입니다. 워낙 좋아했던 소설이구요. <삼국지>가 날것 같은 야생의 묘미가 있다면 <대망>은 보잘것없는 작은 사실조차 모두 아름답고 의미있는, 심오한 것들도 기막히게 포장해놓은 미덕이 있지요. 굉장히 세련된 '소설'입니다.

    일본 우익의 이른바 '스탠스'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별로 아는게 없지만, 그래도 이 두 사람의 경우는 조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미시마 유끼오 같은 사람조차 그리 악당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냥,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들이었지요. 그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한계 같습니다.

    <대망>의 가장 큰 덕목은 일관된 대주제를 전체 일본인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고,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다는 점 같습니다. '평화'는 지금도 평범한 일본인들에게는 더없는 숭고한 테마니까요. 물론 이 경우 역시 대개는 그들이 '피해자'라고 믿는 제한 속에서의 평화염원이니 우리 입장에서는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만, 그들 나름대로는 매우 진지하답니다.

    그렇듯, 역시 말씀하신대로 평화는 그냥 평화가 아니라 '누구의 평화'인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평화가 중요한게 아니라 오늘 우리의 평화가 과연 무엇인가가 중요하겠지요. 통일, 민주, 모두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입에서 말해지고, 누구의 행동에서 빚어지는가가 중요한 것이니 말입니다.
  • 타이슨 2010/01/27 23:06 # 삭제 답글

    일본에 대한 거부감 특히 시대극에 대한 거부감과 료마가 간다를 읽다가 재미없어서 도중에 관둔 기억이 있어 대망을 읽어보려다가 말았는데 한번읽어봐야 겠네요. 님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시라니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 백면서생 2010/01/28 13:10 #

    여러가지 배경을 감안하시고 읽으시면 더 재미있으실겁니다. 물론 그냥 하나의 소설로 생각하고 읽어도 삼국지와는 다른 전국시대의 쟁투를 흥미진진하게 읽으실 수 있지요. 이런 소설 읽고 일본 만세, 를 할 정도로 우리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속좁은 바다표범 2013/07/14 14:54 # 답글

    소설 '대망'을 최근에 접하고 지금도 부지런히 읽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우리의 아픈 역사와 겹친 만큼 많은 관련 도서들과 정보들을 부지런히 접하고 읽고 있습니다. 의문이 나면 어떻게든 정보들을 찾아서 나름의 합리적 판단을 내릴고 또 비판도 하면서 독서 중입니다.
    그런데 인터넷 자료 검색하다가 백면서생님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여러 정보들을 읽다가 너무 궁금한게 생겨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하신 가미카제에 대해 소하치가 '관음'이라고 언급한 부분입니다. 조금 충격적이어서요. 역시 원문 서문은 다르구나 생각도 들었고 원문을 찾고 싶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의 보수적 스탠스나 전후 일본의 상황 그리고 그의 평화 여러가지가 불편하기도 하고 납득도 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이 부분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백면서생님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너무 궁금하고 독자로서 그리고 소설과 주인공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도 되구요. 글 재주가 없어서 서툴게 댓글을 달았네요. 시간 되시면 꼭 답변 부탁드립니다.
  • 백면서생 2013/07/15 01:01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구절은 서문에 있습니다. 제가 읽은 것은 옛날 20권짜리 판본인데, 이후 10권짜리는 잘 모르겠네요. 새로 번역된 판본은 읽을 기회가 없었기에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아무튼 그 '공중관음'은 카미카제로 산화한 조종사들을 일컫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걸 뭔가 미화한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영혼들이겠지요.

    그리고 일본인의 종교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관음'은 그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큰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존재이니 충분히 (그들의) '신'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만 '관음'이라 한 것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덜 명확한 덜 위압적인 神格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도교를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종교에서 관세음보살은 보통 사람들과 매우 친밀하고 또 자주 현현하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절에 서 있기만 하고 숭배만 받는 고고한 존재는 아니랍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그런 표현은 전적으로 종교적이지도 않고,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다고 봅니다. 그 순간에 택한 문학의 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학 하는 사람들의 본령이고, 저는 그걸 존중합니다. 부처, 천사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그는 관음이라고 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일단 다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적어도 히데요시 죽음 이후 수습까지, 혹은 마지막 위험인물이었던 '외눈박이 용' 다테 마사무네가 이에야스가 임종하기 직전에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까지는 보시길 권합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설정을 제외한 대화와 설명은 전적으로 창작입니다. 즉, 야마오카 소하치가 하는 말들입니다. 역사의 투영이라고 보시면 안됩니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는 없습니다.
  • 속좁은 바다표범 2013/07/15 08:44 # 답글

    서생님 성의있는 답변 감사드립니다. 네 제가 일고 있는 것은 전 12권으로 된 책이구요. 현재 9권 돌입했는데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주인공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선 끝까지 다 읽어 본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 내용 잘 이해했습니다. 제가 일본과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얕았던 것 같네요. 일본의 종교성에 대해 한 번 더 알아보고 동아시아와 비교도 해보면 서생님의 답변을 더 잘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투영' 이라는 말 잘 새기고 갑니다. 역사소설에서 경계할 부분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소설과 역사 사료들은 분명 다를 것 같습니다. 자주 블로그 방문하겠습니다. 한주가 시작되는데 오늘 하루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백면서생 2013/08/12 18:17 #

    이런, 다음 답글을 거의 한달이 다 지나서야 보는군요. 미안합니다.

    말씀하신 시기에 사실 이에야스는 이미 다이꼬라는 벼슬이지만 사실상 왕이었던 히데요시의 '중신'이었지요. 모리 데루모도나 다테 마사무네, 혹은 시마즈 집안이 중앙과 거리를 둔 것과 달리 자의든 타의든 히데요시 질서의 일부분이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훗날'을 노렸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히데요시가 6살 많기는 했지만 설마 그렇게 일찍 60 갓 넘기고 죽을 줄은 몰랐을겁니다. 그저 당시 현실에 맞게 자리잡았을 뿐이지요.

    그가 히데요시와 같이 조선 침략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든지, 혼간사를 불태워버린다든지, 그런 돌파형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소설 아닌 실제 역사와 기록을 보아도 대단한 전략가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냥 전국 제패의 야망을 가진 효웅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철학에 바탕한 정치가이기도 했다는 것이고, 그에 입각하여 사람을 다루고 또 전략을 설계했다는 것이 중요한 듯 합니다.

    일본의 종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그냥 불교, 신도, 이렇게 단순화시켜버리면 안 될 듯 합니다. 그건 어느나라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특히 야마오카 소하치가 자주 사용하는 '신불'이라는 개념을 잘 알아야 할 듯 합니다.

    더위가 계속되는 여름입니다.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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