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칸 정도의 행복
대략 십오년 쯤 전에 5,6년 정도 모 대학교 동아리 지도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딱히 한 일은 없고 매주 한 번 가서 모임에 참석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었다. 대부분 1학년과 2학년이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생활 반경이나 경험이 적은 친구들이라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비교적 열심히 들어주곤 했다. 거창하게 '지도'라 했지만 사실 기여한 것은 많지 않았고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저녁 시간을 나누는 정도였다.

그때만해도 그 학교 학생은 공공연히 자신들은 취직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엉뚱한 일들을 열심히 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생물학과인 녀석이 천체 관측에 취미를 붙여서 낮에는 자고 밤에는 별을 들여다보는 일만 하는 놈도 있었고, 동양사학과인 녀석은 유목민에 관심이 많아서 학부 때 이미 중앙아시아 유목민 역사에는 통달하고 있기도 했다. 이른바 수재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다들 머리가 좋았고 생각이 좀 다른 면들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독서량은 매우 형편없었고, 어리고 경험이 없는지라 내가 얼렁뚱땅 주워섬기는 지루한 이야기들을 열심히 경청해주곤 했다. 그중에는 내가 소개하는 책들은 반드시 읽고 와서 내용에 대해 묻곤 해서 당황하게 만드는 친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순진한 19살 20살 들이어서 행복한 만남을 꽤 오래 가졌었다.

그중 한 친구는 그중 더욱 어려보이는 녀석이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데, 생각을 아주 깊이 하곤 해서 질문에 질문이 늘 꼬리를 잇곤 했다. 대부분 그랬지만 대체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심각한 운동권은 아니었고 오히려 인문학에 관한 추상적 토론, 특히 가끔 내가 내놓곤 하는 (내 입장에서의) 해석학적 문제들을 토론하는걸 좋아했다.

이 친구는 내 집에도 놀러온 적이 몇 번 있었고, 술잔을 기울이다가 자고 간 적도 있었다. 장교로 근무했는데, 휴가 때면 연락을 하고 어떤 때는 와서 하룻밤 묵고 가면서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을 나누는건 이 친구 뿐이다. 얼마전 아주 오랫만에 만나 인사동에서 밥을 먹고 작은 공원에서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세상이 하도 답답해서 괴롭다 했다. 물론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괴로워하는 자들이 많으나, 바로 그 괴로워하는 자들이 희망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친구가 며칠 전에 문자를 보냈다. "둘째 순산했습니다. 딸이구요. 산모랑 다 건강합니다"

뭐랄까, 참으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아마 선생님들이 이런 기분 때문에 그 힘든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교수도 아니었고 선배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막상 준 것이 없는데 계속 찾아주는 것이 고마웠고, 그 행복한 순간에 나를 기억해준 것이 고마웠다.

나는 본의 아니게(...) 이른바 '간사' 노릇을 많이 했다. 들어간 학교마다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해 첫 학교를 제외하고는 (나이 때문에 -.-) 결과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이른바 '선배'가 되어버렸고, 이러저러한 단체에서 일을 할 때도 거의 항상 '후배'들과 생활을 했다. 물론 아직 많은 친구들이 연락을 하거나 끊기거나 했고 대개는 그저 안부만 아는데, 그중 유일하게 끝까지 계속 찾아주는 이는 이 녀석 뿐이다. 뭐, 대체적으로 농부가 농사를 잘 못 지어서일터이다.

집 앞의 손바닥 만한 공원 옆(안에서는 피우지 않는다)에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워올리고 있었을 때 문자를 받았는데, 희한하게도 어디선가 까치 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을 기억한다. 지방 모처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는데, 가족 모두 건강하고 살뜰하게 살기를 빌었다.


by 백면서생 | 2009/11/24 00:12 | 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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